보리방편문 해설

다 우리가 아는 일입니다만, 인간은 누구나가 자기 안전을 구해서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유활동이 전개가 되고 차근차근 발전된 뒤에는 생각을 좀 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생활인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한 생활인가?’ 이와 같이 행복을 추구해서 마지않았습니다. 인류 문화사 이후에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과 실패가 있었습니다만 모두가 다 행복을 추구하고, 안전을 추구하는 노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인간이 행복할 것인가?’ 인간의 행위라는 것은 마땅히 먼저 행위를 할 수 있는 근거인 사유체계가 필요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 바른 생각인 것인가? 또는 우리 인간의 본래는 어떤 것인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 불교는 불교대로,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또 현대과학은 과학대로 여러 가지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가신지 25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그런 가지가지의 사유체계 가운데서 완전한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상체계가 있다 하더라도 오늘날에 와서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외의 다른 가르침은 하나의 상대적인 대안적인 가르침이라, 완벽한 가르침이 못됩니다.

 

따라서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도 부처님 가르침, 즉 2500년 동안이나 가지가지 비판을 다 거치고, 또는 여러 가지 사상체계를 다 수용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는, 즉 ‘인간이 구하는 행복이라 하는 문제에 있어서 가장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 이라는 확신이 서기 때문에 제가 오늘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릴 주제는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입니다. 보리방편문의 연원은 다시 발할 것도 없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만, 제2의 석가라 하는 용수보살의 저술중에 『보리심론菩提心論』이라 하는 논장이 있습니다. 보리菩提는 아시는 바와 같이 참다운 진리, 즉 다시 말하면 방편적인 것을 떠난 참다운 최상의 진리, 이른바 우주만유 본래의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진리입니다. 따라서 보리심을, 즉 참다운 진리를 깨닫는 방편의 말씀이 용수보살의 『보리심론』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드릴 보리방편문도 『보리심론』에 근거하지만, 특히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께서 공부를 하셔서 선정禪定중에 전수 받으신 법문입니다. 잘 납득이 안 가신 분들은 모르실 것이지만 선정이라 하는 것은 산란한 마음을 잠재우고서 마음을 참다운 본심자리에 딱 머물게 합니다. 즉 상대유한적인 생각은 다 쉬어버리고서 우주와 나와 둘이 아니라는 그런 경계가 딱 머무는 자리, 이것이 삼매三昧입니다. 이런 삼매에 들어가면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통틀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귀중하고 무한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현재뿐만이 아니라 과거 무수세월 동안 지냈다 하더라도 불교적인 표현으로 하면 무시이래無始以來라, 한도 끝도 없는 오랜 과거도 알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한도 끝도 없는 무종無終이라, 끝도 갓도 없는 미래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삼매의 기운입니다.

 

삼매를 무시한 분들은 그냥 이러한 삼매 가운데 들어있는 신통 자재한 기운을 무시하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부처님 경전에 있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 능력이라 하는 것은 산란스러운 마음을 쉬고 상대유한적인 생각을 떠나서 영원적인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하고 또는 부증불감한 그런 참다운 인간성人間性 ‧ 불성佛性 ‧ 우주성宇宙性 여기에 하나가 된다고 생각할 때 인간이라는 것은 부사의不思義한 힘을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타대화상님께서 이러한 삼매에 들으셔서 제2의 석가라 하는 용수보살한테 직접 받은 수행방편문이 즉 보리방편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때는 상당히 비판도 받았습니다. ‘괜스레 복잡한 것을 내놓지 않았는가. 또는 이런 것이 과연 사실인가?’ 하는 정도로 여러 가지 비판을 받았습니다만 오늘날 여러 석학들이나 불교에 대해서 공부를 하신 분들이 가치를 인정하니까 지금은 비판하는 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8만천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정수를 뽑아 놓았고 그뿐만이 아니라 참선參禪, 염불念佛, 주문呪文과 같은 모든 수행법을 하나로 통합시켰습니다.

 

현대사회는 우리가 신앙을 한다 하더라도 체계가 있어야합니다. 다 종교 사회인지라, 다른 종교와의 구분을 명확히 할 수 있는 그런 체계가 아니고서는 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리방편문은 짤막한 그런 법문 가운데서 불교의 정수를 말하고 있고, 다른 종교보다도 훨씬 더 앞서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금타대화상 말씀을 빌리면 ‘견성오도見性悟道의 첩경捷徑이라, 견성오도 하는 지름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제 말씀을 들으시고서 나중에 공부를 하시면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리방편문의 골격을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바른 순서가 되기 때문에 제가 먼저 보리방편문을 말씀드리기 전에 우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 또는 그 뒤에 각 도인들이 부처님말씀의 체계를 세워 놓으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짤막한 시간에 부처님의 방대한 가르침을 제가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어떤 누구나가 납득이 갈 수가 있고 꼭 알아야 될 그런 체계만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삼시교판三時敎判입니다. 이것은 각 도인이 나오면 도인들이 자기들의 견해에 따라서, 자기들이 공부한 그런 정도에 따라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가르침을 하나의 체계로 비판해서 묶었습니다.

 

가령, 한국의 원효스님 같으면 원효스님대로 자기가 부처님 가르침을 느낀 대로 비판해서 하나의 체계를 세웁니다. 또는 중국의 천태스님 같으면 천태스님 자기 나름대로 부처님의 일대시교,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해가지고서 하나의 체계를 세웁니다.

 

삼시교판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형상적으로 구분을 세워서 비판한 것입니다. 또 더 구체화시키면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부처님의 가르침의 상상을 비판해서 해석 한 것이 판석判釋입니다. 이것은 세 가지의 시기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해서 체계를 세웠습니다. 세 시기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차원 정도에 따라서, 깊고 옅은 정도에 따라서 세 가지 시기로 나누었습니다. 이 정도는 우리 불자님들이 꼭 알아두셔야 불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나 철학을 비판할 때도 굉장히 큰 도움이 됩니다.

 

맨 처음에는 제일시교第一時敎라, 일시교一時敎 이것은 ‘제법실유諸法實有이나 인아人我의 공무空無를 밝히니라.’ 제가 풀이해서 말씀드리면 제법諸法이 예를 들어 하나의 산山이요, 또는 내[川]요, 선善이요, 악惡이요, 또는 불교 과학적으로 말하면 지地요, 수水요, 화火요, 풍風이요 바람 기운이나 또는 물 기운이나 또는 흙 기운이나 또는 불기운이나 그런 것이라든가, 또는 인간세상, 인간이 볼 수 있는 유정有情, 무정無情, 유상有相, 무상無相, 그런 법이 실제 있다고 합니다. 그런 제법이 실제로 있으나 ‘인아’의, 사람은 결국은 ‘공무空無’라, 사람은 텅 비어서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할 때 조금 더 비장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우선은 복을 빌고 자기가 잘되고 그런 차원에서는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의 맛은 못 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복도 받아야 하고 여러 가지 기복적인 것도 필요하고 그런 것이 부처님 가르침 안에 분명히 있습니다만 부처님 가르침은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자기 행복을 구하는데 그치지 않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과학도 초월하고 윤리도 초월해 있습니다. ‘인아의 공무’라 사람이라는 것은 원래 비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인간의 상식을 떠나 있는 말입니다. ‘내가 분명히 있는데 내가 어째서 비어있는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의심을 품어야합니다.

 

또는 이와 같이 고도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가 소양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는 다른 종교와 불교와의 한계도 모호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가장 초기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 가운데도 벌써 ‘내가 원래 없다’는 아상我相이 없다는 ‘무아無我’를 말씀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무아란 말이 안 들어가면 불교가 못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아무리 자기가 좋다 하더라도 무아라는 것을 모르면 불교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어째서 무아인가?’ 이것은 불교를 공부하고 신앙을 가지신 분들은 대체로 아십니다만 지 ‧ 수 ‧ 화 ‧ 풍 사대 바람 기운, 불기운, 땅 기운, 물 기운 이러한 기운이 잠시간 우리 몸의 세포를 구성했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산소, 수소, 탄소, 질소 그 외의 여러 가지 원소가 그때그때 인연 따라 합해져서 우리 몸을 구성했습니다.

 

인연 따라서 구성됐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구성 된 것은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천해서 마지않습니다. 이른바 ‘전변무상轉變無常’이란 말입니다. 비록 사람 몸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것이나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진 것은 그때그때 변동해서 마지않습니다. 따라서 고유한 ‘나’라는 몸뚱이가 사실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장 초기적인 부처님의 가르침도 이와 같이 ‘인아무아’라, 사람이 원래 없다하는, 사람 몸뚱이가 우리 중생이 잘 못 봐서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이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없다고 했습니다. 이 도리를 아셔야 합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 그것은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이런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포가 합해 있어서 이것이 조금도 쉬지 않고 그때그때 변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유한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초기불법에서도 “나라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고, 그러나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지地나 수水나 화火나 풍風이나 산이나 내[川]나 이런 것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자기가 없다, 사람이 없다.’ 이것만도 엄청나게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사람 몸을 구성한 원소인 바람 기운, 물 기운, 불기운 그런 기운마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중생이 도저히 불교를 믿을 수가 없겠지요.

 

부처님께서는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성도하시고서 “내가 차라리 말을 안 해야겠다.” 차라리 부처님께서 말을 않고 바로 열반涅槃에 들으시려고 마음을 먹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욕심에 가리고 진심瞋心에 가린 중생들이 천상천하에 둘도 없는 무상無常 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말해 본댔자 업장 많은 중생들은 못 알아듣는다.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고 고집하고 사는 사람들이 내 말을 곧이 안 들을 것이다. 또는 수긍한다 하더라도 지키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나만 수고스러우니까 말을 안 해야겠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께서는 성도成道하신 다음에 우주의 진리를 훤히 아셔서 “원래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천지우주가 모두 허망虛妄무상하다. 인간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은 뜬 구름이요, 물거품 같다. 이렇게 진리를 말해도 모를 것이다.” 해서 그냥 열반에 들으시려고 마음먹었지만 범천梵天이라 하는 신장神將이 나와서 ‘세존이시여, 비록 일반 어리석은 대중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런 대중 가운데는 과거 선근善根이 많아서, 과거 전생에 닦아온 사람이 많이 있어서 부처님의 어려운 법문도 알아들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반 들으시지 말고 법문을 설하십시오.’ 이와 같이 간청을 드렸습니다.

 

간청을 들으셨으니까 부처님께서 할 수 없이 가장 쉬운 법문으로 하신 법문이 ‘제일시교第一時敎’입니다. 사람은 원래 텅 빈 공空이어서 없는 것이지만,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그런 인간이 보는 객관은 있습니다. 우리 주관은 허망한 것이지만 객관은 존재한다. 이런 정도의 가르침이 제일시교입니다.

 

이것은 부처님 육성 같은 아함경에 “ 지 ‧ 수 ‧ 화 ‧ 풍 사대가 잠시간 합해져서 우리 몸이 이루어졌지만 사람은 공무空無하다.” ‘사람은 비어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무엇인가? ‘나’라고 고집하는 마음, ‘너라고 고집하는 마음, 또는 좋다 궂다 고집하는 마음, 그 마음은 무엇인가? 우리가 감수하고 상상하고, 의혹하고, 분별시비하고 이런 것이 모여서 우리 마음이 됐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이 됐지만 과연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좋은 마음, 궂은 마음, 남 미워하는 마음, 남 좋아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2조 혜가스님께서 달마스님한테 가서 “제가 마음이 불안스럽습니다.” 그러니까 달마스님께서 “불안한 마음을 내놔라.” 했습니다. 2조 혜가스님이 불안한 마음이 어디 가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안한 마음이 자취가 없습니다. 남 미워하면 미워하는 마음이 자취가 있습니까. 남 싫어하면 싫어하는 마음이 자취가 있습니까. 내가 아프면 아프다는 마음이 자취가 있습니까. 그런 마음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남 좋아하는 마음, 남 싫어하는 마음, 아프다는 마음, 그런 마음이 흔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내 몸도 바람기운, 또는 불기운, 물 기운, 흙 기운, 지금으로 말하면 산소, 수소, 탄소, 질소 등 여러 가지 원소가 합해서 잠시간도 머물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몸도 다 비어있지만, 또 우리 마음도 역시 어디에도 흔적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업장에 가리어서 바로 못 보니까 ‘나’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보는 청정한 성자의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만 세포만 빙빙 돌아서 활동하고 결합돼서 운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전자 현미경을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전자나 양자가 그런 것이 결합돼서 운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안목, 전자보다 더 세밀하고 우주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볼 수 있는 부처님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에 충만해 있는 불성佛性기운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운동하고 있습니다. 산이나 내[川]나 사람이나 어떤 것이나 모두 다 광명 빛나는 불성기운이 잠시간 활동하고 있는 것이 나요 너요, 또는 산이요 내요 일체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견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 중생은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거꾸로 꿈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꿈이 아닌 참다운 깨달음의 불교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맨 처음에는 제일시교第一時敎라 해서 ‘사람은 비록 무아無我라 해서 공空했지만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선善이나 악惡이나 일반 중생이 말한 그런 객관은 있다.’ 이렇게 말씀했지만, 이것은 중생이 너무나 허무할까봐서 일반 중생들은 자기와 자기 권속, 자기 재산이 제일 중요한데 없다고 하면 너무나 허무를 느껴버립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그냥 깊은 도를 한 번에 말씀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사람은 비록 공하다 하더라도 선이나, 악이나 그런 것은 존재한다. 산소요 수소요 그런 것은 참말로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물리학자에게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이 참말로 있다’고 하면 역시 그 분들이 회의를 품으실 것입니다. 다만 양성자, 중성자 그런 것이 모여서 활동하는 것, 운동하는 것을 가리켜서 전자, 양자, 그러는 것이지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이 실제로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중성자나 또는 전자나 그런 것의 결합 여하에 따라서 산소, 수소, 질소 그러는 것이지 산소면 산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수소면 수소가 고유하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어느 순간 그런 상황을 볼 뿐이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무상한지라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전자도 과정에 불과하고, 중성자도 과정에 불과합니다.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변천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입니다.

 

소승小乘이라 하는 것은 ‘내가 원래 없지만 일반 객관은 존재한다.’ 그것이 소승입니다. 그러나 소승은 부처님께서 하고 싶은 법문의 참다운 내용은 못 됩니다. 그래서 중생들의 근기가 좀 높아져서 조금 더 총명해질 때는 그야말로 제이시교第二時敎라, 부처님께서는 ‘일체만법이 다 비어있다.’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의 길을 밝혔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가 항시 외우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또는 『금강경金剛經』이나 『유마경維摩經』의 도리입니다. ‘모두가 다 비어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만 무아無我가 아니라 우리가 보는 객관세계, 하늘에 있는 별이나 또는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비어있습니다.

 

사실은 비어있다는 정도, 이것은 현대물리학도 증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리학이 없었던 옛날에는 정말로 제법공諸法空이라 하는 그런 도리를 알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옛날뿐만 아니라, 설사 물리학을 배웠다 하더라도 ‘분석해서 들어가면 텅텅 비어버린다. 물질은 비어서 에너지만 남는다.’는 것을 설사 안다 하더라도 ‘모두가 비어있다.’라는 말을 하면 굉장히 허무감을 느낍니다. ‘무엇인가 있어야 할 것인데 왜 비었는가. 내가 분명히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인데 왜 비었는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의단疑團을 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진리입니다. 또는 진리가 아니면 인간이 구하는 행복이라든가 참다운 자유, 참다운 평등, 참다운 민주화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민주화를 부르고 참다운 자유를 부르짖지만 사실은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진리를 따라야 얻을 수가 있는 것인데 진리를 따르지 못하면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무엇인가?’ 우선 ‘내가 비었다는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또는 그와 동시에 ‘우리 객관이 다 비어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비록 우리 중생의 몸이 즉 말하자면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사대四大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대 용어로 하면 산소나 수소나 질소의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결합돼서 하나의 세포가 된다고 하면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그런 것은 과연 있는 것인가.

 

부처님법문에 따르면  지, 수, 화, 풍 사대, ‘지’ 땅기운도 불가득不可得이라 얻을 수가 없고 또는 ‘수’ 물 기운도 불가득이라 물 기운도 얻을 수 가 없고, 바람 ‘풍’도 역시 불가득이라 얻을 수가 없고, 어떤 질료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도 다 부처님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이라, 과거도 얻을 수가 없고 또는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이라, 현재도 얻을 수가 없고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 미래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하나의 물질을 중심으로 해서 물질이 변화되는 과정 따라서 지나가면 과거요,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미래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러한 공간적인 물질을 떠나버리면 과거나 현재나 미래는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어렵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금타대화상의 보리방편문을 설명하려고 할 때는 이런 선행적인 지식을 알지 못하면 보리방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제일시교第一時敎는 우리 중생에게 결국은 ‘나는 무아無我인 것이다 그러나 대상은 있다.’ 이런 정도로 말씀하셨고, 그 다음 제이시교第二時敎에서는 ‘나만, 우리 주관만 공空이 아니라 객관적인 모두가 다 텅텅 비어있다. 이른바 제법공諸法空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야심경』식으로 말하면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오온五蘊이라 하는 것은 물질과 정신이 오온 아닙니까. 그런 오온이 다 비어있습니다. 오온개공을 잘 모르면 『반야심경』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오온이 다 비었음을 비추어봐야만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인생고人生苦를 구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고를 떠나서 참다운 행복을 구하지만, 오온개공을 모르면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떠나서는 참다운 자유도, 참다운 행복도 없습니다. 꼭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참다운 인생의 복지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도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비어있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비어있는 것입니까?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산소도 역시 중성자, 양성자가 적당히 합해있습니다. 중성자, 양성자가 몇 개 합해있는가에 따라서 산소, 질소, 탄소 그런 구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떠나서는 산소나 탄소나 질소나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이것도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있습니다. 그러면 전자나 중성자나 양성자나 그것은 무엇인가?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역시 에너지의 하나의 진동에 불과한 것이지 이것도 고유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일체 모든 것은 에너지라 하는, 우주의 정기라고 하는 그것으로 다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즉 우주의 정기, 에너지만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볼 수 있는 현상적인 것은 모두가 다 에너지의 적당한 결합, 적당한 활동, 적당한 운동에 불과합니다. 사실은 그렇게 모두가 텅텅 비어있습니다. 따라서 현대물리학이 증명은 못했다 하더라도 우선 유추해서 ‘일체만유一切滿有가 다 비어있다’는 소식은 아는 것입니다.

 

불교가 아니더라도 ‘모두는 비어있다. 나도 비어있고 그야말로 너도 비어있고, 일체만유는 다 에너지뿐이다. 모두가 에너지의 활동뿐이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이 현대물리학입니다. 그러나 그런 물리학자는 이렇게 유추하고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정말로 공空도리를 체험하기는 어렵습니다.

 

보살菩薩이라 하는 것은 공부를 해서, 체험을 해가지고서 자기 몸도 환경도 텅텅 비어버린 것을 체험합니다. 이른바 우리가 참선參禪도 많이 하고, 염불念佛도 많이 해서 마음이 통일이 딱 되면 욕심이 줄어지고, 진심瞋心이 줄어지고, 이렇게 가다가 번뇌煩惱가 딱 녹아지면 정말로 텅텅 비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주관도 공이요 객관도 공이요, 다 공인 소식을 공부를 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라 하는 것이 이른바 죽음도 떠나는 것이고, 다 떠나는 것입니다. 이른바 항시 영원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제이시교에서는 모두가 공한 도리, 『반야심경』에서는 제법공諸法空한 도리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만 공만 된다고 생각하면 우리 불교는 너무 허망합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께서 우리한테 애쓰고 말씀하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이 아닌 무엇인가 있습니다. 비록 공이지만, 비록 우리가 보는 것은 허망하고 실존이 아니지만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결국은 인연이 있으면 사람이 생기고 무엇이 생기고 합니다.

 

우리가 엄밀히 본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가 보는 대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무엇인가 잠시간 과정적이나마 가짜는 있습니다. 그것 보고 ‘가아假我’라, ‘거짓 가假’자, ‘나 아我’자 가아라 합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망령된 나, 내가 김 아무개 박 아무개 하는 그런 ‘나’는 사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는 있습니다. 이른바 잠시간 있는 ‘나’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인가. 우주의 정기를 불교적인 표현으로 하면 불성佛性입니다. 현대적인 말로 하면 에너지가 되겠지요. 물질이 다 텅텅 비어서 우주가 파괴가 되어버린다 하더라도 에너지만은 존재합니다. 나중에 다시 에너지의 활동으로 해서 우주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그와 같은 도리를 분명히 말했습니다. 우주가 파괴가 돼서 괴겁壞劫이라, 우주가 텅텅 비어서 그야말로 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이라 텅텅 빈 공겁空劫이 됩니다. 공겁이 된 뒤에는 다시 거기서 순수한 생명이 우주를 생성시킵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이렇게 우주생성원리까지 다 풀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물질은 다 비어버린다 하더라도, 우리가 보는 그런 허망한 것은 없어진다 하더라도 참말로 있는 것은 불성이고 또는 순수에너지입니다.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제삼시교第三時敎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모두가 다 비었다 하는 주관도 비고 객관도 비었다 하는 그런 공에 집착하는 것과, 또는 소승小乘은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데 객관이 없는 것인데 일반 소승은 있다고 봅니다. 소승의 그런 유집有執을,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다 아울러서, 우리가 부정하기 위해서 비공비유比空非有라, 비어있지도 않고 있지도 않고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대로 있지 않고, 또는 소승이 보는 대로 아직 낮은 보살이 보는 대로 해서 비어있지도 않습니다. 정말로 비어있지 않고, 정말로 있지도 않은 참다운 중도中道를 밝혔습니다.

 

이와 같이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중도를 밝힌 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마지막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마지막 말, 이것을 꼭 취해야 합니다. ‘있다’ 하는 것도, 또는 ‘비었다’ 하는 것도 우리는 취해서는 안 됩니다. 비어있지도 않고 있지도 않고 말입니다.

 

참다운 것, 영생永生으로 존재하는 또는 시간과 공간과 모두를 다 떠나서 항시 있는 에너지 같이, 우주가 다 파괴되어 버린다 하더라도, 에너지 불멸이라 에너지는 우주에 항시 있습니다. 따라서 깨달은 분들은 생사를 떠나서, 모두를 다 떠나서 항시 있는 영원히 존재하는 그러한 중도실상의 불성을 보는 것이고 거기에 안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도 없고, 또는 여러 가지 불행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선행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세 차원으로 나누어서 검토를 해 보았습니다. 가장 낮은 차원은 제일시교第一時敎 ‘나는 허망하고 그림자 같지만 객관적인 사물은 존재한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그 다음 제이시교에서는 ‘나도 비어있고 허망하지만 결국 객관도 모두가 텅텅 비어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제삼시교에서는 ‘주관도 객관도 다 비어있고 참말로 존재하는 진짜 내가 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참다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가르치신 참다운 가르침입니다.

 

『법화경法華經』 같은 부처님 결론 같은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나오신 뜻이 무엇인가 하면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어디에도 안 치우치신 중도의 대도大道를 우리 중생이 알고 느끼고 깨달아서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도, 마땅히 ‘중도中道’라고 하신 부처님의 마지막 법문을 꼭 느끼시고 아셔야 만이 참다운 해탈과 자유와 참다운 행복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보리방편문의 골격을 제가 간추려서 여기에 도식으로 표시했습니다. 이 보리방편문은 한 말로 말하면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말씀했습니다. 이른바 불교 한문식으로 말하면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말씀하신 것이 보리방편문 줄거리의 골격입니다. 따라서 조금 복잡하게 이론 전개가 되어 있고, 법문이 상당히 길지만 한 말로 말하면 결국 심즉시불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방편문의 대의입니다.

 

                                                                                                如來

                                                                                                眞如

                                                                                                法性

                                     法身…淸淨法身毘盧遮那佛…空…陀               實相

                                                                                                菩提

                                                                                                道

                    心      報身…圓滿報身盧舍那佛……性…彌     佛        大我

                                                                                                眞我

                             化身…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相··阿              涅槃

                                                                                                極樂

                                                                                                一物

                                                                                               中道

                                                                                                  覺

                                                                                             主人公

 

 

분석해 놓고 보면 불심佛心과 중생심衆生心은 둘이 아닙니다. 나쁜 사람 마음이나 좋은 사람 마음이나 겉만 다르고 표현만 다른 것이지 속의 알맹이는 똑같은 것입니다. 석가모니 마음이나 예수마음이나 공자마음이나 마음의 깊이는 똑같은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의 마음의 계발 정도에 따라서 차이만 있습니다.

 

따라서 만물이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니고 일체중생이 나와 더불어서 원래 하나란 말입니다. 이것은 불교인뿐만 아니라 유교나 도교도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만물이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일체중생이 나와 더불어서 하나란 말입니다.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안다고 생각할 때에는 자기만 잘되기 위해서 남을 구박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사람 마음이나 모두가 다 바로 부처입니다. 한계나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김가 마음이나 박가 마음이나, 또는 공부를 좀 한 사람 마음이나, 누구 마음이나 모두가 다 간격도 없이 바로 부처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나 같이 못나고 업장 많은 사람이 왜 부처일 것인가.’ 의심을 갖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즉 무명심無明心이라, 무명無明이란 말은 굉장히 소중한 표현인 것입니다. 밝지 않습니다. 우리한테 있는 불성佛性, 부처님마음은 훤히 밝아서 우주를 다 비추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업장에 가려서 밝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을 내가 다 모릅니다. 무명 때문에 몰라서 그런 것이지 잘나나 못나나 좀 덜 배우나 많이 배우나 모두가 다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러기에 심즉시불心卽時佛이라, 마음이 부처인 것인데 그 마음자리를 바로 부처라 하면 너무 싱겁고, 또 부처님의 가르침이 하도 복잡하니까 부처님 경전 따라서 조금 더 해설을 해야 하겠지요. 그 중 가장 체계적으로 한 해설이 보리방편문식 해설입니다.

 

우리 마음의 근본 본체를 법신法身 그럽니다. 또 그것을 불교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입니다. 해석은 불경에 가서 있는 법문입니다. 따라서 보리방편문은 불경에 있는 그런 귀중한 술어를 원용援用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상관성 있게 이해할 수가 있겠지요. 우리 마음의 근본체성體性, 본체를 법신이라 하는 것이고, 조금 더 구체화시켜서 말하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대일여래大日如來’의 뜻은 무엇인가 하면 우주를 훤히 비추고 있는 광명이란 뜻입니다. 대일여래라는 것은 큰 대大’자, 날 일日‘자, 이런 태양 같은 광명이 아니라 몇 천 배 몇 만 배나 더 밝은 우주의 광명, 우주의 생명을 대일여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더 새기면 광명변조光明邊照라, 태양보다 훨씬 더 밝은 광대무변한 광명의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본 체성은 광명변조라, 우주에 광명이 곽 차있습니다. 잘나나 못나나 미련한 사람이나 벙어리나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의 본래 마음자리는 다 천지우주에 꽉 차있는 광명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은 미처 못 보는 것이고 성자는 분명히 거기에 하나가 됐습니다.

 

그런 청정법신자리, 우리 마음의 본체자리에 들어있는 자비나 지혜나 일체공덕을 보신報身이라 합니다. 우리 인간성의 본바탕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를 다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조금 더 보편적으로 얘기 하지 않고서 협소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법신法身은 사람만의 본체다’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부처님 뜻은 그렇게 좁지 않습니다. ‘유정有情, 무정無情, 유상有相, 무상無上 일체존재를 말한 것입니다. 산이나 내[川]나 물질이나 모든 존재들의 가장 근본이 되는 본체를 법신이라 합니다.

 

또한 그 법신 속에 들어있는 모든 공덕功德, 지혜나 자비나 능력이나 일체의 가능성을 보신이라 합니다. 이것을 보다 더 구체화시키면 ‘원만보신圓滿報身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 합니다. 이것을 또 달리 말하면 정만성해淨滿性海라, 즉 일체공덕이 갖춰있는 성품의 바다와 같습니다.

 

보리방편문은 이렇게 굉장히 고도한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8만4천 법문 가운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지만, 사실은 꼭 우리가 알아두어야 합니다. ‘현대 과학보다도 불교가 어째서 앞서는 것인가.’ 또는 ‘같은 불교 내에도 어떠한 것이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가장 골수인 것인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 또는 좋은 스승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다종교 사회 가운데서 불교가 으뜸 되는 그런 의의, 또는 과학이 도리어 주인이 되어 있고 인간이 끌려가는 현대에 있어서 불교가 과학보다 더 앞서 있다는 증거, 이것을 알아야하기 때문에 이런 법문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과 우주의 모든 존재의 근본이 법신인 것이고, 또 그 법신에 포함되어 있는 일체공덕이 보신입니다. 또 거기에서 우러나는 현상적인 것은 모두가 화신化身입니다.

 

법신·보신·화신 이것을 잘 외워두십시오. 오늘 보리방편문을 가져가셔서 천번 만번 보시면 굉장히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금생뿐 아니라 세세생생에 큰 보배가 될 것입니다. 나중에 꼭 그렇게 아실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법신 이것은 인생과 우주의 본래자리입니다. 순수생명자리, 이것이 법신인 것입니다. 순수생명자리, 법신에 들어있는 모든 공덕, 지혜, 능력, 자비, 행복 일체가 다 들어있는 불교적인 표현으로 하면 ‘일만공덕一萬功德이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많은 공덕이 원만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보신입니다. 또는 그 자리에서 산이요 내[川]요 사람이요 또는 일체중생이 나옵니다. 그래서 현상적인 모두는 화신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 가르침은 모든 우주를 다 통틀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역시 화신 자리에서는, 현상적인, 형상화된 자리에서는 조그마한 인간 밖에 안 되지만 우리 마음 깊이에서는 결국 보신, 법신자리는 다 똑같아집니다. 이것을 아셔야합니다.

 

무변대해無邊大海에서 천파만파 파도가 일어납니다. 또는 천개 만개 또는 몇 십억의 거품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그 거품이나 파도는 높고 낮고 거품도 적고 크고 하겠지요. 그런 차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의 바다도 그렇습니다. 우주란 것은 법신이라 하는 순수한 생명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순수한 생명은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것이 아니라, 일체 공덕을 행복이나 자비나 지혜를 다 갖추고 있는 것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일체 진리와 일체 공덕이 다 들어있는 바다 가운데서 일어나는 존재가 사람이요 하늘에 있는 별이요 산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고향은 법신이고 보신입니다. 법신·보신은 영원히 변동이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고 부증불감不增不感이라,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또는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또는 더럽지 않고 청정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에너지의 세계가 법신·보신입니다.

 

이 자리에 갖추어져 있는 여러 가지의 인연의 힘으로 해서 인연력因緣力이라, 부처님 법문식으로 하면 무시이래無始以來의 인연력이라, 부처님 법문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심심미묘합니다. 우주에 갖추어져 있는 인연의 힘으로 해서 산하대지 삼라만상이 나옵니다. 이것도 보다 세밀한 해석이 있습니다만 전문적인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보리방편문의 지혜, 이것은 비단 자기뿐만이 아니라 일체 우주를 다 통괄해 있습니다.

 

내 마음을 파고 들어가도 법신·보신·화신인 것입니다. 하나의 원소나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파고 들어가면 역시 다 보신이고 화신인 것입니다. 다만 현상적인 차이에서만 강씨, 박씨, 이씨의 차이가 있는 것이고, 두두물물로 현상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보신·법신차원에서는 모두가 하나란 말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하나인 자리를 훤히 보이는 성자가 자기만 위하고 남을 학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중생은 화신 경계에 현상적인 세계에 얽매인 것이고, 성자는 보신·법신을 훤히 봐서 말이나 행동을 보신報身, 법신法身에 입각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신·보신·화신化身을 합한 것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법신만도 부처가 아닌 것이고, 또는 보신만도 부처가 아닌 것이고 현상이나 실상實相이나, 현상이나 절대나, 상대를 모두 합해서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가 바로 부처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서 우주와 하나가 된 분이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어떤 도인들도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우주의 진리, 법신·보신을 깨달은 분입니다.

 

우리 중생도 금생에는 못 깨닫는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의 바탕이 바로 법신이요 보신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법신·보신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못되면 우리가 윤회輪廻를 하겠지요. 사람으로 소로 개로 돼지로 갔다왔다 합니다. 우리 인간은 반드시 깨달아서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게으른 사람들은 금생에 못되고, 내생來生에도 못 될 것이고 부지런하고 정말로 바른 사람들은 금생에 될 것이고, 금생에 못되면 내생에 되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자리를 중생이 잘 모르니까, 부처님께서 그때그때 경전 따라서, 사람 따라서 달리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를 진여眞如라, 불성佛性이라, 법성法性이라, 실상實相이라, 중도中道라, 보리菩提라, 열반涅槃이라 여래如來라, 주인공主人公이라 이와 같이 불렀습니다. 부처란 말이나, 여래란 말이나, 주인공이란 말이나, 또는 열반이란 말이나, 또는 보리란 말이나, 또는 중도란 말이나 실상이나 법성이나 진여나 똑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알고서 불경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불경을 보든지 ‘아! 그렇구나.’ ‘이 불경은 공空을 주로 말했구나.’ ‘이 불경은 유有를 주로 말했구나.’ ‘이 불경은 부처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를 바로 말씀하신 거구나.’ 이와 같이 우리가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골격으로 이루어진 것이 보리방편문의 체계입니다.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말한 것인데 마음자리, 마음 본성이 바로 법성인 것이고 법신 속에 들어있는 모든 공덕이 보신이고, 또는 법신·보신에서 이루어진 사람이나 산이나 별이나 일체 존재가 화신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은 화신 가운데 개별적인 하나란 말입니다. 따라서 화신에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법신·보신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화신이 됐다 하더라도 지금 나와 너는 정말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봐서 차이가 있는 것이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화신이 된 이 자리에서 김 아무개란 사람, 박아무개란 사람, 그 사람도 역시 별도의 존재가 아닙니다. 현대물리학을 공부한 우리 젊은 세대는 다 아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비록 나와 네가 이와 같이 둘로 있다 하더라도 근본에서 볼 때는 하나입니다.

 

어째서 하나인 것인가. 우리 중생이 사는 데는 공간이 다 있습니다. 공간 속에는 산소나 수소 같은 원소가 꽉 차있습니다. 공기가 있다고 생각할 때에 역시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로 꽉 차있습니다. 그런 것은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립자 같은 것은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에너지가 없는 공간이 있습니까. 그런 공간은 없습니다. 나와 남은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다만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런 달리 보이는 것이지 원자의 차원, 또는 에너지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딱 붙어있습니다.

 

내 몸도 산소나 수소나 질소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또는 내 몸과 네 몸 사이 공간도 역시 산소나 수소나 질소로 해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과 나와도 결국은 다 붙어있는 것입니다. 우주가 모두 다 남남이 아닙니다. 다만 중생은 그런 이치를 모르는 것이니까 ‘나와 남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이지 이치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나와 남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선행적인 지식을 두시고서 이 보리방편문을 공부하시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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